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는 중세시대 영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운문소설로 저자 나이 53세 때인 1387 년부터 집필이 시작되어 1400년 저자의 사망으로 중단된 미완성 대작이다. 이 작품이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창작되었다면 오늘날 이만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당시 영국 지배층 언어로 간주되던 프랑스어나 라틴어 대신 고유 언어인 영어로 창작된 대작소설이라는 점에서 영문학사에 있어 큰 가치를 차지하는 중요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캔터베리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순례 성지로 추앙받던 영국 남부 캔터베리사원을 참배하러 가던 서른 한명의 순례자가 런던 템스강변 남단 서덕(Southwark)-사우스워크가 아니다-에 있는 한 여관에 모였는데 여관 주인의 제의로 이들 순례자가 돌아가면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경연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세 영국 설화문학이 이 한권에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순례자들은 기사와 그의 종, 여자 수도원장과 그의 사제, 수도사, 옥스퍼드대학의 대학생, 바스(Bath)에서 온 여자 직조공, 선원, 상인, 방앗간 주인 등 당시 영국의 다양한 계층을 망라할 뿐 아니라 순례자들의 용모나 성격, 생각 등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영국인들의 세계관 , 인생관, 사회제도, 풍속, 습관 등을 통하여 당시 사회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가 대체 어떤 곳이길래 14세기, 영국 각지에서 모여든 그토록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순례를 떠난단 말인가?

 

Canterbury Cathedral from the north west;1890&1900 (retouched from a black & white photograph), source: wikipedia

19세기말 북서쪽에서 본 캔터베리성당 사진

 

Canterbury, Kent, UK

 

캔터베리는 런던 남동쪽에 위치한 켄트(Kent)지방 중심도시로 켄트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영국을 연결시키는 영국의 현관과 같은 역할을 해온 곳이다. 또한 영국 날씨가 대체로 음습함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켄트 일대는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하여 영국 사람들은 켄트를 영국의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켄트가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 대륙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다 보니 기원전후 로마인들이 영국을 침략한 루트가 되기도 했고 이어 게르만족 일파인 주트족이 켄트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정복왕 윌리엄이 노르망디에서 건너와 처음 영국 땅을 차지한 곳도 켄트였고 오늘날 런던과 파리를 이어주는 고속열차가 지나가는 영불해저터널의 영국 쪽을 품고 있는 곳도 켄트지방이다.

 

물론 로마에서부터 시작되어 유럽에 널리 퍼진 기독교가 처음 영국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곳도 켄트지방이었다. 이 켄트의 중심도시 캔터베리에 교회가 들어선 것은 이미 로마의 영국 통치기인 4세기부터로 추정되나 오늘날 캔터베리성당은 서기 596년 교황 그레고리오1세가 당시 앵글로색슨족의 차지가 된 영국의 교화를 위해 베네딕트수도회 수도사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그를 통하여 이듬해 교회 건축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캔터베리성당은 로마 카톨릭의 주교좌로 영국 기독교의 중심으로 성장했으며 역사의 부침에 따라 약탈과 소실, 재건을 반복하기도 했으나 16세기 헨리8세가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한 이른바 수장령 이후에도 흔히 성공회라 하는 영국 국교회 대주교좌를 모신 성당으로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당건물은 1067년 화재 소실 후 노르만왕조의 통치 아래 1070년부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이 시작되어 이후 확장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14세기 제프리 초서가 창작한 인간 군상들이 캔터베리로 순례여행을 떠난 것은 그곳에 주교좌가 있는 영국 제일의 큰 성당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기적을 만드는 순교성인 토머스 베케트(Thomas Becket)의 묘소가 캔터베리성당,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순교성인 토머스 베케트의 묘소는 기적적인 치유의 힘을 가진 것으로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심지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토머스의 베케트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 관에 키스를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니 이 기도빨의 끝판왕, 토머스 베케트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영국 각처에서 몰려든 초서의 인간 군상들이 캔터베리를 앞두고 런던 템스강가의 여관에 속속 모여들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었던 것이다.

 


 

토머스 베케트는 1118년 런던 상공업 중심지인 시티지역에 살던 부유한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 상인 가문에서 출생했다. 신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 했지만 결정적으로 당시 신학 공부를 위한 필수였던 라틴어 실력이 형편없어서 애초에 신학자가 될 싹수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이 스무 살 무렵 부친 사업이 어려워 신학 공부를 위한 지원이 끊기자 공부를 포기하고 아버지가 소개시켜준 친척 가게 점원으로 나섰다가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시어볼드(Theobald of Bec)의 가사 일을 돌봐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베케트는 씨어볼드의 개인 일을 봐주면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라며 집안에서 배운 대로 씨어볼드의 수입과 지출을 잘 관리하여 시어볼드의 재산을 크게 불려주었던 것이다. 돈 맥여 주는데 누군들 이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친 김에 시어볼드는 베케트가 카톨릭 사제가 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시어볼드의 지원으로 로마 유학까지 다녀온 베케트는 1154년 사제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후 베케트는 시어볼드의 지원을 등에 업고 캔터베리성당의 부주교로 승승장구 했고 시어볼드의 천거로 당시 영국 국왕 헨리2세의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고관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St Thomas Becket enthroned as Archbishop of Canterbury from a Nottingham Alabaster in the Victoria & Albert Museum

캔터베리대주교에 임명되는 토마스 베케트의 석고 부조,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헨리2세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노르망디 출신이었던 헨리2세는 프랑스 왕 루이7세와 다투어 거대한 프랑스 서부 일대를 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영국 왕위까지 차지한 후 아일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 정복에 나섰다. 이렇게 벌려놓은 일이 많으니 군비조달을 포함하여 왕실 재정을 확보하는 일은 헨리2세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이런 마당에 토머스 베케트가 왕실 재정 담당으로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재정을 크게 늘려 놓자 베케트에 대한 헨리2세의 신뢰는 더욱 공고해져 자신의 큰 아들인 "청년왕 헨리"를 베케트에게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사적으로 왕자의 교육까지 맡게 되었으니 베케트의 앞날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사실 베케트가 왕실 재정을 크게 늘려 놓은 데는 그가 중세시대 왕권과 함께 권력의 한 축이었던 교회 재산 현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점, 이를 바탕으로 교회와 사제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스스로 사제의 신분이었던 베케트는 교회와 동료 사제들을 쥐어짜 왕실 재정에 기여한 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1161년 캔터베리 대주교 시어볼드가 사망하자 헨리2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베케트를 그 후임으로 삼고자 했다. 자신의 총신이었던 베케트를 대주교의 자리에 앉혀 교회 권력까지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베케트는 이런 헨리2세의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교회와 사제들에게까지 세금을 거둬들였던 왕실 재정담당 베케트는,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사제 신분으로 교회 수장이 되어 교회권력을 왕권에 예속시키는 일에 "총대"를 매는 것까지는 내켜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케트의 거듭되는 고사에도 불구하고 헨리2세는 베케트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앉히고 싶은 의지를 끝내 관철시켰다. 마지못해 캔터베리 대주교의 자리에 앉게 된 베케트는 헨리2세에게 "머지않아 전하께서는 저를 사랑하는 만큼 저를 증오하시게 될 것"이라 탄식하며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사건은 베케트의 예언 아닌 예언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베케트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자리에 앉자 왕실 공직에서 사임하고 교회 권익 수호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치게 된 것이다.

 

St Thomas Becket's return from a Nottingham Alabaster in the Victoria & Albert Museum

토마스 베케트의 귀국 장면 석고 부조,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중세는 로마 카톨릭을 기반으로 한 교권과 왕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이 많던 시대였다. 왕에게 세금 내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데 아낌없는 일이 많다는 것 또한 옛날과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 왕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했고 대주교가 된 베케트는 사사건건 왕의 시도를 방해했다. 결국 헨리2세와 베케트의 관계는 1164년에 벌어진 클라렌든 재판법(the Constitution of Clarendon)이라는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되었다. 당시에는 범죄 재판을 왕실과 교회가 나누어 행하고 있었는데 성직자들 중에 세속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범죄자들이 범행 후 성직자를 칭하는 사례조차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성직을 가진 범죄자를 재판할 권한이 없었고 오직 교회만이 이들 범죄자들을 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재는 게 편이라고 당연히 교회는 이들 성직을 가진 범죄자 혹은 성직을 칭하는 범죄자들을 처벌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이는 왕권을 크게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벌금형의 경우 그 수입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 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세상 큰 갈등 중에 돈 문제가 얽히지 않은 갈등이 드문 법이다. 헨리2세는 솔즈베리 인근에 있는 클라렌든 궁전에 고위 성직자들을 불러들여 앞으로는 성직자의 중범죄에 대해 왕실 법정에서 직접 재판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클라렌든 재판법을 통과시겼다. 이 클라렌든 재판법에 대해 베케트는 왕의 면전에서 법의 부당함을 반박했고 베케트의 이러한 행동에 헨리 2세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기에 이르러 신변에 위협을 느낀 베케트는 프랑스로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헨리2세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달아난 베케트는 헨리2세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7세의 보호 아래 6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St Thomas Becket meets Pope Alexander III at Sens, Nottingham Alabaster panel, late 15th century, Victoria & Albert Museum.

교황 알렉산더3세를 알현하는 토마스 베케트의 석고 부조, 15세기 후반 작품,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베케트의 망명생활은 본인은 물론 헨리2세에게도 무척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헨리2세는 베케트에게 회유의 시그널을 보냈고 교황 역시 이에 중재역으로 나서 1170년 베케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영국으로 돌아와 캔터베리의 대주교좌를 되찾은 베케트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헨리2세가 자기 측근으로 임명한 런던과 요크 대주교를 파문해버린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헨리2세는 격분했고 이 분노에 찬 왕의 목소리를 들은 왕의 장수 4명은 이를 베케트를 시해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캔터베리로 향했다. 당시 헨리2세가 베케트의 시해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정황으로 보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이리하여 1170년 12월 19일, 헨리2세의 장수 4명은 캔터베리성당 지하 기도실로 향하던 베케트를 무참히 살해했다. 베케트가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Alabaster panel carved and painted with green paint; depicting the murder of St. Thomas Becket, British Museum

토마스 베케트 순교 장면 석고 부조, 15세기 중반 작품, 영국박물관

 

사후 베케트의 시신은 캔터베리성당에 안치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케트의 묘소에 참배하러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 참배객 중 갖은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했다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전 유럽으로 번져 급기야 묘소를 관리하던 수도사들과 치유를 경험한 참배객들은 베케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달라고 교황에게 청원, 교황은 1173년 토머스 베케트를 성인으로 시성하기에 이르렀으며 베케트가 암살당하고 묻힌 캔터베리성당은 성인의 순교성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번지자 베케트의 순교는 헨리2세에게 크나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고 급기야는 헨리2세의 장남 "청년왕 헨리"가 반란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헨리2세는 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어떻게든 베케트의 암살과 자신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야 할 명분에 쫓기게 된다. 이리하여 헨리2세는 제왕의 의복 대신 참회의 뜻으로 누추한 베옷을 갈아입고 그것도 맨발로 캔터베리성당으로 걸어가 베케트의 묘소를 참배하는 참회의 포퍼먼스를 벌여야 했으며 게다가 캔터베리의 성직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하는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베케트의 암살과 관련된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고 했다. 헨리2세가 벌인 이 참회의 퍼포먼스는 베케트의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여 캔터베리성당의 베케트의 묘소는 이후 삼백 여 년간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순례성지가 되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영험 있는 순교성지가 되어 초서의 『캔터베리이야기』에 등장하는 순례자들을 끌어 모았던 캔터베리성당의 베케트 묘소는 16세기 헨리8세가 로마 카톨릭과 결별, 영국 국교회를 따로 설립하고 캔터베리성당이 로마의 주교좌에서 영국 국교회의 대주교좌 성당으로 바뀌면서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을 입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로마 카톨릭과의 결별이라는 강수를 두었던 헨리8세에게는 왕권에 대항하여 교회 권익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카톨릭의 순교 성인 베케트야 말로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선왕 헨리2세가 행해야 했던 참회의 퍼포먼스 자체가 제왕으로서는 씻기 어려운 치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에 1538년 헨리8세는 왕명으로 캔터베리성당 내 베케트의 묘소를 돌이킬 수 없도록 철저히 파괴해버렸다. 이후 순례자들은 캔터베리성당을 더 이상 참배할 수 없게 되었고 베케트에 대한 순교 신앙도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베케트에 대한 신앙은 참으로 엉뚱한 곳에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베케트의 부친은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이었지만 오랜 옛날부터 런던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런던 시티지역에 기반을 둔 상인이었을 뿐 아니라 베케트도 런던 시티에서 출생했다. 런던의 상인들은 치유의 기적을 만드는 순교자 베케트보다 사제로서 교회와 주교의 재산을 불려주었던 그리고 왕가의 관리로서 왕의 재산을 크게 불려 주었던 베케트의 현세적 능력에 더욱 주목했다. 갈 곳을 잃은 베케트의 순교 신앙은 이 런던 시티에서 이 지역 상인들의 수호성인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이후 런던 시티의 상점가에서는 가게의 안녕과 번창을 비는 뜻에서 베케트의 성상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헨리8세의 왕명으로 사라졌던 베케트의 묘소는 원래 묘소가 있던 자리의 표시로 캔터베리성당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음을 물론이려니와 로마 카톨릭의 순교 성인이었던 베케트가 영국 국교회의 순교 성인으로 시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렇듯 토머스 베케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그는 신앙, 곧 교회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세속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헨리2세의 총신이었을 때 노르망디지방의 군사원정에 동행 했는데 이때 베케트는 큰 무공을 세우기도 해서 애초 헨리2세가 베케트를 캔터베리대주교에 임명하려 하자 사제들 사이에는 성직자가 아닌 군인을 대주교로 모시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캔터베리대주교에 자리에 앉자마자 베케트는 죽음을 무릅쓰고 교권 수호를 위해 앞장서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집념의 화신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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