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또 한 장 옛날 영화 포스터가 있다. 1985년에 세상에 나온 영화 『백야』(White Nights)다. 이 역시 세월에 빛이 바래고 촌스러운 모양이다. 그러나 탭댄스의 달인 그레고리 하인즈(Gregory Hines), 청순함의 대명사 이사벨라 롯세리니(Isabella Rossellini),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쉬니코프(Mikhail Baryshnikov) 등 주연 배우들의 면면을 또렷이 기억할 뿐 아니라 그 줄거리도 기억에 선하다. 영화 『백야』는 내게 똘이장군을 지나, 이소룡의 쌍절곤을 찍고, 성룡의 취권 스탭을 밟은 후 성년을 목전에 둔 시절의 방점과 같은 영화였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백야』는 옛 소련 출신으로 서방에 망명한 발레리노 바리쉬니코프의 자전과 같은 영화에 스스로 주연으로 출연한, 사실과 허구가 기묘하게 엮인 영화다. 영화 속 니콜라이 로드첸코라는 소련의 발레리노가 서방으로 망명을 했다. 8년 후에 그는 비행기 사고로 다시 소련땅에 불시착하게 되고 당시 소련 KGB는 그를 소련으로 역망명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다. 이를 위해 KGB는 역시 소련으로 망명한, 내 기억으로는 베트남전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탈영한 후 소련 측으로 넘어간 것으로 영화에서 설정된 흑인 텝 댄서 레이몬드 그린우드의 집에 니콜라이를 감금시켜 놓고 둘이 함께 공연 연습을 하도록 강요한다. 이사벨라 롯세리니가 분한 다냐는 레이몬드가 소련으로 망명한 후 얻은 부인이다.

 

소련으로 역망명 한 소련 출신의 발레리노와 망명자인 베트남 참전 흑인 병사의 공동 공연, 이 깜짝쇼를 기획하는 KGB는 이 공연이 훌륭한 정치선전 도구가 될 것으로 믿고 둘의 공연을 밀어 붙이는데 니콜라이의 마음은 언제든 이 백야의 동토에서 다시 도망치고 싶고 레이몬드 역시 비록 탈영 후에 적성 국가로 도망쳐 왔지만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니콜라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발레리나인 옛 애인과 재회시키는 등 KGB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무시무시한 KGB 보다 영악한 니콜라이는 온갖 역경을 딛고 이번에는 레이몬드와 그의 처까지 데리고 다시 서방으로 도망쳐버린다는 이야기이다.

 

영화가 나온 1985년은 레이건 시절로 대표되는 총성없는 전쟁 이른바 냉전의 정점이었다. 냉전은 첩보전과 선전전의 격화를 의미했고 이 냉전의 변방이자 한편으로 최전선이었던 우리나라에서 공산측과 자유진영의 첨예한 이념대결을 그린 정치선전물로 이 만한 영화가 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야』는 당시 북한의 수공 위협이 있다며 온 나라가 떠들석했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금강산댐을 지어야 한다며 온 국민을 상대로 성금을 거두어 가던 어이없던 대국민 사기극이 벌어졌던 그 시절, 이 땅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으며 그 속에 영화 『백야』를 본 감동으로 몸서리를 치던 고등학생으로 내가 끼여 있었다. 영화는 탱크보다 훨씬 강하다. 시뻘건 깃발 휘날리며 죽창 들고 돌진하는 선전 포스터보다 감동으로 포장한 멜로 영화 한편이 훨씬 정치적이다. 그래서 소련이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냉전의 군수공장 할리우드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기준을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 기막힌 소리가 타락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면죄부에 찍힌 문구가 된 현실이 또 어처구니 없기도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 아닌가? 그래서 오늘의 기준으로 나는 영화 『백야』를 정치선전물로 격하시킬 의도는 없다. 영화 『백야』에는 수준 높은 발레, 탭댄스, 그르륵 소리를 내며 가슴을 긁어대는 러시아 전통 음악이 있었고 영화보다 더 히트를 기록한 팝뮤직이 있었으며 숭고한 우정이 있었고 또 사랑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내가 영화 『백야』를 잊지 못하는 이유는 포터블 오디오 한 대 때문이다.

 

모노 사운드 카셋트 플레이어로 늦은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음악을 듣던 나는 영화 속에서 니콜라이와 레이몬드가 댄스 연습실의 마루바닥에 올려놓고 음악을 틀어 논 포터블 오디오에 맞추어 탭 댄스를 출 때 나는 그 포터블 오디오를 하늘이 내린 물건으로 알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내가 스스로 번듯하게 직장을 다니며 돈을 벌어 제일 처음 장만한 물건은 용산전자상가 용팔이들에게 바가지를 쓰며 산 일제 파나소닉 포터블 오디오 한 대였고 이 오디오는 아침에는 스타 쉽(Starship)의 "Nothing's Gonna Stop Us Now"를 빵빵하고 짱짱하게 울리며 일 터로 나서는 나의 등을 두드렸고 밤에는 라이오넬 리치(Lionel Richie)의 "Say You Say Me"를 감미롭고 풍요롭게 울리며 일 터에서 돌아온 피로한 나의 가슴을 어루만져주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멋졌던 파나소닉 포터블 오디오의 리모콘은 작동 불능이고 카셋트 플레이어와 CD 플레이어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간혹 고음에는 찢어 지고 저음에는 갈라지는 소리를 내지만 영화 『백야』 속 그 포터블 오디오는 아직도 컴퓨터 모니터 위 선반에 올려져 컴퓨터 스피커 노릇을 해내고 있다. 모니터에 비친 옛날 영화 백야의 포스터를 닫으며 고개 들어 선반 위에 놓인 포터블 오디로를 흘깃 바라본다. 언젠가 저 마저 태광 에로이카 전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세월은 참 쏜 살 같다. 2005

 

Lionel Richie

Say You Say Me

'○ 옛날 영화를 보러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 알지도 못하면서  (0) 2022.06.30
코쿠리코 언덕에서  (0) 2022.04.13
무숙자  (0) 2022.03.22
싱거운 복면달호  (0) 2022.03.21
데쓰 프루프  (0) 2022.01.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