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 장사익 기타: 김광석 충청남도 홍천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부락 태어나 나이 오십 줄에 카수가 되어 히트를 깐 사나이가 있다. 서울 생활 40년에도 그의 표현은 가수가 아니라 카수고 인기를 얻은 것도 아니고 히트를 친 것도 아니고 요새 말로 뜬 것도 아닌 히트를 깠다는 식이다. 농악을 친-농약을 쳤다로 깜빡 잘못 알아보았다- 아부지 밑에서 어린 시절 신명을 배운 것을 빼고는 말 잘 듣고 핵교 잘 댕기는 장남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은 꿈에도 없었고 은행에 취직해서 서울 생활하는 것만으로 출세라 생각했다. 술도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점에서만은 친구들도 아예 제껴 놨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낙원동 음악학원에서 노래를 배웠다. "가슴 아프게" 한 곡을 가지고 일주일 연습하는 식으로 3년을 그렇게 노래를 배웠다. 보험회사 내근직으로 직장 생활 3년 만에 군대에 갔다. 이용복과 조영남과 신중현과 톰 존스의 노래를 잘 부르던 그는 문선대의 인기 카수였고 생애 최초의 히트를 깠다. 제대를 했으나 막막했다. 가수 한다고 시골 전답을 팔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장남이었다. 그로부터 나이 오십 줄에 이를 때까지 그의 인생은 내리막이었다. 회사도 여러 곳 옮겨 다니고 노점까지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하지만 자발머리 없는 성미에 거짓말 안하고 진짜 열심히 사는데 살림은 점점 궁색해지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이 답답한 세월을 살아오며 그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마음쩍으로 많이 힘든 시절, 그래서 배운 것이 태평소였다. 1990년부터는 매제의 카센타에 사무장으로 일하면서 그야말로 얹혀사는 것 같은 막막한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태평소를 놓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1993년 새해가 밝자 평소 알고 지내던 김덕수 패 등에게 붙어 따라다니게만 해 달라고 졸라 풍물놀이 패로 나섰다. 아부지가 시골서 보내주는 쌀로 먹고 살며 결심 단단히 한 게 빛을 보아 그 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도 장원을 하고 그렇게 그는 태평소에서만큼은 알아주는 장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자리에 연주를 하러 다니고 또 상도 받고 하다 보니 자연 뒤풀이 자리가 늘었고 왕년에 다진 실력으로 또 그는 소문난 뒤풀이 카수가 되었다. 지인들이 판 한번 제대로 벌려 보자고 달려드는 통에 1994년 신촌에서 드디어 첫 공연을 열었다. 공연은 성황이었고 이튿날 깨어보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길을 찾은 것이다. 내친 김에 음반도 내고 무대 가수로 본격적으로 판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지금껏 네 장의 음반을 내고 돈이 되건 안 되건 가고 싶은 자리에 가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현장 가수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가 생각(思)의 날개(翼)라는 이름에 장씨 성을 가진 장사익이다. 겸제의 인왕제색도를 보는 듯 창밖에 인왕산이 비껴 우뚝 서 있는 전망 좋은 집에 사는 것을 유일한 사치로 꼽으며 지금도 티 쌰쓰에 추리닝 입고 밖에 나가믄 아무도 몰라본다는데 행복해 한다. 어린 그에게 "고래 같구 태산 같았던" 그의 아부지는 소 장사, 돼지 장사 제일 하빠리 직업이었다는데 그가 노래의 길을 찾아 세상을 전전하며 고단한 길을 걷던 사이에도 그를 지켜주시던 아부지 생각이 나서 가끔 그는 공연할 때 중절모 눌러 쓰고 자전거 따릉 따릉 하면서 무대에 오른다. 아부지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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