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2.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수도로 삼고 도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 1394년이고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의 수도 역시 서울이니 서울은 지난 600여 년간 변함없는 우리나라의 수도였다. 뿐만 아니라 초기 백제의 수도 위례성 자리가 지금의 풍납토성 자리라는 것이 확실하므로 역사 시대로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온 서울의 내력은 세계 어느 고도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참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서울이 이토록 오랜 역사를 지닌 고도라는 흔적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울에는 많은 문화 유적이 흩어져 있고 도심 한가운데는 아름다운 고궁이 자리 잡고 있지만 이런 곳들은 아무래도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유적일 뿐 일상생활에서 고도로서의 흔적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기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비록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큰 치욕을 겪기는 했지만 불과 한 세기전의 흔적조차 깡그리 밀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러 찾지 않아도 많은 서울 시민들이 제 갈 길로 오고 가며 쉽게 접할 수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지면서 현재도 그 쓰임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 유적이 있겠는데 내가 생각하기로 그 대표 격이 한강철교가 아닐까 한다. 한강철교의 교각이 지탱하고 있는 철골 상판의 트러스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으로 매우 튼튼해 보여서 한 세기전의 토목기술을 고증하는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하다. 게다가 철근 콘크리트 일체 구조가 아닌, 석재를 돌담 쌓듯 하나하나 쌓아 올린 교각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강철교가 대충 만든 교량이 아니라 대단한 노력과 기술을 쏟아 부은 역작임과 동시에 우리의 근대를 표상하는 훌륭한 징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대하(大河)로 불러 크게 부끄러울 바 없는 한강과 같은 드넓고 아름다운 강이 대도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예는 내가 알기로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드물다고 한다. 그러므로 한강과 그 한강의 수계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오늘 날의 서울 시민과 경기 도민에게 한강은 무척 큰 축복임과 동시에 그 한강 위에 놓인 아름다운 교량, 한강철교는 그 연유이야 어찌 되건 반드시 기리고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는 생각이다. 마침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착실한 진보가 있은 듯해서 2006년에 한강 철교는 보존해야 필요성이 있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한강철교가 건설된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1876년 소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한 이래 나라는 해가 갈수록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을 틈타 서구 열강의 힘을 등에 업은 외국 사업가들이 이 땅에서 이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런 모양새로 1896년에 경인선 철도의 부설권과 함께 한강에 기차가 통과할 수 있는 철교의 부설권을 처음 얻은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였다고 한다. 이렇게 철도와 교량의 부설권을 외국인에게 넘겨 버린 이유는 당시 조선 정부가 그만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해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나마 당초 조선정부와 모스가 맺은 한강철교의 건설 계약에는 보행자의 편의 위해 보도를 만들 것, 배들이 원활하게 한강 수계를 따라 통행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인선 철도의 기공식은 1897년에 있었고 곧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모스 역시 대규모 공사를 감당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던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공사는 이내 중지되었고 결국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경인철도회사(京仁鐵道會社)에 경인철도 및 한강철교 부설권이 팔려 버렸던 것이다. 이 시기는 일본인들이 한반도 점령 야욕을 점점 구체화시켜 가던 때였다. 해서 경인선 철도 부설권이 당초 미국인에서 일본인들에게 팔려 버린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도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계약을 인수한 일본인들은 공사비를 문제 삼아 보도 가설을 하도록 된 원계약을 파기했으며 일본인들 역시 공사에 어려움을 느껴 시일을 끌다가 1900년 7월에야 한강 철교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완공 당시 한강철교는 근대식 토목 공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현재의 한강철교를 이루고 있는 교각 일부는 처음 모스가 건설한 것이고 상부 트러스 구조를 이루는 철제는 61m짜리로 미국산이었다. 원래 계획되었던 보도는 일제 강점이 한창이던 1917년 인도교가 가설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강철교는 모두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건설된 순서에 따라 A, B, C, D로 구분하여 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하며 최초의 A교가 완공된 이후 통행량이 증가하면서 1912년에 똑같은 모양으로 A교를 기준으로 한강 상류 쪽에 B교가 완공되었으며 역시 일본인들에 의해 1944년에 C교가 완공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한강 철교는 모두 폭파되었으며 이후 한강철교의 복구는 전후 혼란기에 더디게 진행되어 1957년에 가서야 C교만 복구되었고 A교와 B교까지 완전히 복구된 것은 전후로부터 무려 16년이 지난 1969년에 이루어졌다.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과 함께 한강 철교에 대한 이용 빈도도 엄청나게 늘어 수도권 전철, 경부, 호남, 전라선 철도까지 한강철교를 이용하게 되자 1995년에 따로 D교가 완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매주 주말 나의 자전거 타기의 대부분 한강 강변을 따라 이어지며 잠실에서 행주대교까지의 구간을 자전거로 주파하는 동안 무려 13개의 한강 다리들을 지나치게 된다. 이 중에 선유도와 한강시민공원 양화지구를 연결하는 선유교를 포함시키고 한강철교가 정확하게는 4개의 교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 열 일곱 개 다리를 지나치게 되는 것이고 여기다 반포대교가 아래에 잠수교를 품은 2중 교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열 여덟 개나 된다. 이 많은 한강 다리들 중 언제나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이 땅의 근대사를 함께 품으며 건설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흐름을 지켜온 한강철교, 특히 A와 B 두 개의 다리이다. 지난 주말에도 맑고 푸른 가을 하늘과 역시 맑고 푸른 물이 도도히 흐르는 한강 사이에 한강철교가 서있고, 그 한강 철교 위를 쉼 없이 오고 가는 수도권 전철과,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열차 속의 우리의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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