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체 보다 오래 쓰려고 큰돈을 주고 마련한 모니터였지만 본체보다 먼저 고장이 나버렸다. 보다 얇고 가벼운 모니터로 교체했더니 서재가 갑자기 넓어 보여 마음까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으로 휑한 마음을 채울지 몰라 우선 액자로 벽을 채워볼 생각이었다. 고흐의 그림은 이미 집에 몇 점 걸려 있고 잠시 마네(Manet)의 그림을 생각했지만 정작 액자로 주문한 그림은 모네(Monet)의 그림이었다. 마네라는 이름은 유럽 근대미술사의 윗자리에 항상 등장하지만 집을 장식할 그림으로 마네의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는 마네가 짊어진 짐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속 모델이었던 빅토린(Victorine Meurent)도 함께 짊어진, 그러나 여자였던 까닭에 더욱 힘겹게 짊어진 짐이었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Edouard Manet, Luncheon on the Grass, 1863, Musee d'Orsay, Paris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는 후대에 현대미술을 서막을 연 걸작으로,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는 악명 높은 졸작으로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원래 제목이 「목욕 」이었던 「점심 식사」를 그릴 때 마네는 르네상스와 전대 프랑스의 거장들이 즐겨 사용했던 구성과 형식을 충실히 차용했다. 다만 그는 차용한 양식을 통하여 현대적 주제를 표현하고 싶었고 「점심 식사」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했겠지만 그 화제로 인하여 견디기 힘든 비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현대적인 주제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부르조아 사회의 문화, 더욱이 그림의 내용이 암시하는바 그대로 하필이면 '짝지은 혼음'이라 할 만큼 향락 문화를 표현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그려진 「올랭피아」가 불러일으킨 논란에 비하면 「점심 식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올랭피아」 역시 「점심 식사」에 이어 형식상으로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이 역시 이전 대가들의 작품을 충실히 답습했다. 마네는 전대 대가들의 작품을 누구보다도 많이 모작했고 그러나 누구보다도 독창적이었다. 선도 높은 색조를 대담하게 처리하여 평면적인 느낌을 강조한 혁신적 양식을 두 그림을 통하여 창조한 것이다. 문제는 그림이 아니라 '올랭피아' 자체였다.

 

마네, 올랭피아, 1863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Edouard Manet, Olympia, 1863, Musee d'Orsay, Paris

 

올랭피아는 매매춘이 창궐하던 당시 파리에서 매춘부의 이름으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누가 봐도 그녀의 나체는 성화나 신화 속의 누드가 아니라 파리 시내 어느 구석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매춘부의 나체 그 자체였다. 설익은 육체는 싱싱하나 팔등신과 거리가 멀다. 그녀의 허연 나신에 간신히 걸친 몇 개의 액세서리는 당시 유행으로 보아 그녀가 매춘부라는 확증을 선사했다. 게다가 그녀는 신고 벗기에 지극히 편리한 슬리퍼를 침대 위에서 그것도 한 짝은 벗은 채 한 짝은 반쯤 발가락에 걸친 채 비스듬히 누워 있다. 그녀의 나신과 강렬하게 대비되는 흑인 하녀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데 이 꽃다발은 문 밖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암시를 전하며 음부를 살짝 덮은, ‘가린’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도발적인 그녀의 손은 오히려 음모가 노출된 상황보다 더욱 자극적이다. 게다가 캔버스 왼쪽 아래의 그려진 검은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여자의 음부를 뜻하는 속어였다. 대충 그려진 것 같은 올랭피아는 매우 치밀한 작품이었으며 어느 하나 마네의 계산이 작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그림들로 마네는 당시의 관전이었던 살롱전에서 언감생심, 입선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네에게 돌아온 것은 낙선과 기성 화단의 배척, 견디기 힘든 언론의 조롱, 그리고 부도덕하다는 대중의 비난뿐이었다. 에밀 졸라와 같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극소수의 우군이 있었지만 마네는 크게 낙담했다. 특히 기법 상으로 형편없다는 야유는 그림에 있어 고도의 테크니션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마네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비난이었으리라.

 

알렉산더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Alexandre Cabanel, The Birth of Venus, 1863, Musee d'Orsay, Paris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만을 놓고 보자면 현대적인 기준으로도 도발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가 그토록 화단에 냉대 받고 대중에게 비난 받아야 했을까? 사람들은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진실이 드러날 때 분노한다. 특히 그 진실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숨기고자 하는 욕구도 강해지며 그것이 폭로될 때 강한 분노를 그 폭로자에게 느끼게 된다. 「올랭피아」가 발표된 그 해 살롱전에서 입선한 그림은 카바넬(Alexandre Cabanel)이라는 화가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었고 그 그림은 당시 프랑스의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구입했다. 마네는 스스로 보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고 했다. 마네는 살롱전에 그가 보지 못한 팔등신 비너스의 나신 대신에 그가 본, 사람들이 너나없이 본 당시 매춘부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겨 놓았다. 게다가 교양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살롱전에 그 그림을 내 놓았다. 그의 시도는 전대 거장들과 당시 기성 화단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졌고 교양인들에 대한 부도덕한 폭거로 비춰졌다. 그가 받은 비난의 실체는 진실의 폭로자로서 감내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올랭피아」의 캔버스가 찢어지거나 파손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주최 측에서 조심스럽게 관리해 준 덕분이다 … 어느 날 우리는 전시회에서 나와 루아얄 거리 입구에 있는 이모다라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갔다. 점원이 신문을 가져오자 마네가 그에게 물었다. "신문에서 뭐라던가요?"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 우리는 그의 화실로 올라갔다 … 그처럼 낙담한 마네의 표정을 나는 이전에 본적이 없었다.

 

계속된 푸르스트의 증언에 따르면 마네는 더 이상 신문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대한 화가에 대한 이미지처럼 마네가 실제 생활에서 기이하거나 괴팍했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며 미남이었고 항상 연미복 차림에 중절모를 쓴 깔끔한 신사였다. 그림으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부루조아의 삶에 가장 근접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으며 그는 파리 사교계 사람이었다. 그의 직관은 날카로웠으며 논쟁을 피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고 언사는 늘 친절하고 상냥한 신사의 그것이었다. 당연히 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이후에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미술사조 인상파의 우두머리로 대접 받게 데에는 작품의 혁신적인 면모 이외에도 사람을 끄는 그의 사교술이 한 몫 했음은 당연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일수록 세평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때로 그것을 목숨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런 그가 발표한 그림들 때문에 있지도 않은 갖가지 추문과 조롱에 휩싸이게 된 것이니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상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앙리 팡텡-라투르, 마네의 초상, 1867년, 시카고미술관

Henri Fantin-Latour, Portrait of Edouard Manet, 1867,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올랭피아」 발표 후 세상의 반응에 크게 낙담한 마네는 훌쩍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을 통하여 마네는 평소 존경해 마지 않던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Diego de Velzquez)의 작품들을 만났고 그간의 소란으로 지친 심신을 달랜 후 파리로 돌아왔다. 마네는 두 점의 그림으로 악명을 얻었지만 악명도 명성은 명성이었다. 사실 1860년대 마네가 발표한 작품을 두고 세상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허공에 총질을 해댄다는 비난은 이미 당시에도 있었고 마네의 평생 친구의 한 사람이었던 드가(Edgar Degas) 역시 그 문제로 마네와 언쟁을 벌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것이 치밀하게 의도된 것이건 우연한 것이건 이 점에서 마네는 분명 성공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마네는 악명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이후에는 마네의 패거리, 곧 당시 미술계의 전위 그룹이었던 인상파의 맏형 대접을 받았으며 종국에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살롱전 입선의 영예를 거머쥐었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사후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그의 패거리들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기념비적 작품인 「올랭피아」를 사들여 이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이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올랭피아」를 루브르박물관에 걸었다. 마네가 병고 끝에 쉰 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후 그의 친구이자 옹호자였던 에밀 졸라는 1884년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에두아르 마네가 죽은 다음날 돌연 예찬의 소리가 일어났다. 모든 신문은 한 사람의 위대한 화가의 죽음을 알려주고 머리를 숙였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졸면서 농담을 하던 사람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관 속에 들어가서야 겨우 승리를 획득한 이 거장에게 찬사를 올렸다.

 

피카소가 「점심 식사」를 보고 남겼다는 한 마디, "고통은 나중을 위한 것이지."라는 말처럼 마네가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를 발표하고 겪은 고통은 나중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두 작품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에서 마네를 위해 벌거벗고 모델을 섰던, 마네가 겪은 당대의 추문과 훗날의 영광 속에 또 다른 당사자,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눈빛으로 캔버스 바깥을 노려보던 마네의 모델 빅토린이 작품 발표 후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확인할 단초는 아무 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한갓 어린 누드 모델이었던 빅토린에게 나중의 영광 따위가 있을 리 없었으니 그녀가 겪었을지 모르는 고통은 누가 기억해주겠는가? 그 고통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이지만 분명한 것은 당대에 마네가 겪은 고통만큼 그녀도 함께 고통을 겪었으리라. 비평가 귀스타프 제푸르아는 증언한다.

 

모델 빅토린은 실제로 역마살이 낀 자유분방한 여인네로 마네가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맥주 홀의 바람기 있는 여자이다 … 그녀의 눈빛은 신비롭고 얼굴은 매정한 어린아이 같다.

 

벌거벗은 비너스의 역할이 아니라 벌거벗은 창녀의 역할로 마네의 두 그림에서 서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빅토린은 그저 “내놓고 돌리는” 바람기 많은 여자였을까? 다른 진실이 있다.

 


 

빅토린 뫼랑은 마네가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마네는 1862년 쥐스티스 궁전에서 사람들 틈에 섞인 그녀를 처음 보고 그 독특한 분위기에 반했다. 당시 그녀는 열 여덟 살이었는데 벌써 쿠튀르(Thomas Couture)의 화실에서 모델로 일하고 있었다. 마네 역시 열 여덟 살에 쿠튀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빅토린을 만날 당시에는 이미 쿠튀르의 화실에서 나와 화실을 마련하고 독립된 작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으로 살롱전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은 1859년 마네 나이 스물 일곱 살 때 일이었다.

 

마네, 거리의 가수, 1863년, 보스턴미술관

Edouard Manet, The Street Singer, 1863, Museum of Fine Arts, Boston

 

이 그림이 발표되었을 때 색상이 단조롭다는 비평을 얻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형편없다."이다. 마네는 중간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색상이 단조로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마네는 친구와 함께 자기 화실 근처에 있는 프트디폴로뉴 거리를 걷다가 기타를 들고 카페에서 나오는 여인을 발견했다. 그 모습은 마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이를 작품으로 만들 결심하고 여인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여인은 거절했다. 그때 마네는 동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녀에게 쫓아가서 한번 더 부탁해봐야지 그래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빅토린에게 똑같은 포즈를 취하게 해야겠어." 이때 마네가 그린 작품이 「거리의 가수」였다. 빅토린은 기타 연주도 잘했고 그림도 곧잘 그린 팔방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빅토린은 이후 십여 년 동안 마네가 고집스럽게 찾은 모델이었으며 이 시기 마네의 걸작들에 자주 등장했다. 인내심과 매력, 활기, 대담함 등 모델로서 그녀가 가진 훌륭한 자질들은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당시의 증언의 의하면 빅토린이 마네를 위해 긴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준 것은 나름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네, 빅토린 뫼랑, 1862년, 보스턴미술관

Edouard Manet, Victorine Meurent, 1862, Museum of Fine Arts, Boston

 

빅토린을 모델로 그린 최초의 그림. 그녀 목의 검은 색 리본은 그녀의 그림에서 몇 차례 더 등장한다. 아마 그녀가 좋아한 액세서리였을 것이다.

 

그녀를 모델로 그린 마네의 완성된 유화는 대략 여덟 점 남아 있다. 특이한 점은 그녀가 나신으로 등장하든 옷을 입고 등장하든 빠짐없이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작품을 보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가 무엇이건 애초 마네가 그녀에게 기대했던 것 역시 보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길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개를 모로 돌리든 정면으로 바라보든 한결같이 작품을 보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마네의 작품 속 약간의 사시 기미가 있는 그녀의 눈길은 그녀가 걸었던 험난한 길의 복선 같다. 근대 서구 미술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에 모델을 섰던 그녀도 놀랍게도 화가였던 것이다. 그녀가 그린 작품은 단지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게다가 모델로서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탓에 그녀가 화가였다는 사실조차 따로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서구 회화가 만개했던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여성 화가가 걸어야 했던 고단한 숙명을 상징하는 존재로 화가로서 빅토린 뫼랑을 재조명 하려는 움직임이 조용하게 시도되고 있다. 나이 스물인 빅토린의 이미지는 마네의 그림 때문에 고급 매춘부로 대중에 각인되었다. 마네가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동안 빅토린 역시 매춘부 올랭피아의 모델로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 유명세에 대해 그녀는 당찬 성격에 어울리게 대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유명세는 젊은 여성에게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화단이, 언론이, 대중이 마네의 작품에 대하여 설왕설래하고 있는 동안 빅토린은 꼼짝없이 매춘부로 작품 속에서 그리고 현실 생활에서 발목이 잡혀있는 꼴이었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마네의 음탕한 그림에 대하여 쑥덕거리고 있는 동안 모델인 빅토린이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같은 시대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Gustave Courbet)가 앵무새를 손에 얹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나부를 1866년 살롱전에 출품해 마네의 「올랭피아」를 조롱하며 누드란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야 한다는 듯 훈수를 두자 마네는 오히려 빅토린을 한껏 성장시켜 그린 「앵무새와 여인」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누드화 열심히 그리라며 대응 했다. 이 빅토린의 전신 초상화는 품위 있고 우아한 여성미를 보여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마네의 몫이지 빅토린의 몫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네의 그림 속 이미지들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으리라. 이는 마네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 그녀의 속내를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조차 예외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쿠르베, 앵무새와 여인, 186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Gustave Courbet, Woman with Parrot, 1866,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음탕한 그림으로 치자면 마네는 쿠르베의 적수조차 되지 못했다. 쿠르베의 몇몇 작품은 포르노그라피와 예술의 한계 사이에서 위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다만, 쿠르베는 음탕한 작품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고객을 위해 주문제작에 응했을 따름이었다. 바로 그 차이였던 것이다.

 

마네, 앵무새와 여인, 186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douard Manet, Woman with Parrot, 1866,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사람들은 마네의 그림들 때문에 그녀가 진짜 매춘부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직업 모델이자 화가 지망생일 뿐이었다. 마네의 전기 작가인 타바롱(Alphonse Tabarant)은 빅토린이 마네의 화실에 처음 모델을 서러 왔을 때 화가인척 했으나 사실 무늬만 화가였다고 했지만 그때 그녀의 나이 기껏 열 여덟 살이었다. 터무니없는 폄하다. 그녀는 미술에 대하여 진지했고 정식 교육기관과 개인교습을 통해 미술을 배워볼 참이었으며 모델을 그만둔 후에 실제 그렇게 했다. 1866년 「여인과 앵무새」를 마지막으로 빅토린은 한동안 마네의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데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프로이센전쟁 등 정치적 사회적 격변이 있었고 그 속에 휘말린 마네의 처지가 빅토린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빅토린도 모델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화가 수업에 뛰어든 때문인 듯도 하다. 물론 마네의 그림이 세상에 발표된 후에 그녀가 치르게 된 달갑지 않은 유명세 때문에 더 이상 누드 모델을 설 수 없었으리라 추측하는 것 역시 억지스럽지는 않다. 지난 일에 대해 당당하게 대응하는 것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녀는 다시 구설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화단의 주류에 진입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화가 지망생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마네, 투우사 복장을 한 빅토린, 186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douard Manet, Victorine Meurent in the Costume of an Espada, 1862,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1870년대 초 그녀는 미국 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왜 미국에 갔는지, 얼마 동안 미국에 머물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역시 타바롱에 의하면 싸구려 충동에 휩싸인 미친 짓거리로 미국에 갔다지만 그녀가 미국에서 그림을 팔아보려고 했다는 단초가 남아 있으므로 이 역시 근거 없는 폄하인 것 같다. 미국 여행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 1873년 후부터 빅토린은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에 뛰어 들었는데 당시 이름 있던 초상화가였던 르로이(Etienne Leroy)라는 화가에게 사사했고 1876년에는 살롱전에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살롱전은 우리 식으로 국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1862년 열 여덟 살의 누드 모델로 마네의 화실에 등장한 빅토린은 14년을 돌아 국전 출품 화가가 된 것이다. 같은 해 마네 역시 살롱전에 작품을 내어 놓았다. 물론 낙선했지만. 미국에서 빅토린이 돌아오자 마네는 다시 한번 그녀를 모델로 「철길」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그녀에게 마네의 모델로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었다. 이 그림에서 빅토린은 파리의 생 라자르역이 건너 보이는 언덕에 앉아 한 손에 책을 쥐고 앉아 있는 한 아이의 엄마 역할로 등장했다. 단정하게 잘 차려 입은 의상 때문에 한결 여유 있는 느낌을 주고 이 여유는 등을 지고 기차 역사 쪽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 때문에 더욱 안정되어 보인다. 이제 빅토린은 성장을 한 두 남자들 사이 벌거벗고 앉아 캔버스 바깥을 응시하는 묘령의 여인도 아니었고 열 여덟 살의 매춘부 올랭피아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네의 작품과 관련한 갖은 추문과 미국 여행길을 돌고 돌아 삶의 질곡을 맛본 나이 서른의 원숙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철길」에서 조차 캔버스 바깥을 응시하는 불가해한 눈길은 여전했지만 그녀를 둘러싼 배경은 확실히 변해 있었다.

 

마네, 철길, 1873년, 내셔널갤러리, 워싱턴

Edouard Manet, The Railway, 1873,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1879년에 빅토린은 두 번째로 살롱전에 출품했다. 「19세기 뉴렌베르크의 부루조아」란 제목을 가진 그림이었다. 이즈음 마네와 그의 패거리들은 그녀를 외면하게 되었다. 타바롱에 의하면 이유는 스캔들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불쾌한 가십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상대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는 상세는 그때도,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다. 세상 모든 스캔들의 속성이 그러하듯 문제는 그저 여자일 따름이다. 빅토린은 아랑곳없이 파리에 살며 그림을 그렸지만 1880년대에 그녀는 경제적으로 꽤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 같다. 1883년 마네가 사망하자 빅토린은 마네의 미망인인 쉬렌(Suzanne Leenhoff)에게 편지를 보내 마네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금전 문제를 언급했다. 즉, 마네는 빅토린에게 그녀가 모델이 되어준 작품이 잘 팔린다면 얼마간의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것, 당시 그녀는 마네의 제안을 웃어 넘겼지만 그녀가 모델 생활을 그만둘 때 마네에게 그의 약속을 지켜 달라고 말할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마네가 사망했으니 미망인께서 그 약속을 지켜 달라는 것이 요지인데 마네의 미망인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반면, 빅토린이 보낸 곤궁을 호소하는 편지는 잘 보관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마네의 일대기를 기록한 화첩을 겸한 책에는 이 편지의 원본이 사진으로 찍혀 게재되어 있어 책을 보면 누구라도 빅토린이 마네의 미망인에게 보낸 그 편지를 볼 수 있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듯 했던 빅토린은 1890년대 초 거리에서 우연히 마네 패거리의 시야에 잡혔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빅토린은 여전히 몽마르트 거리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술을 퍼 마시고 다녔고 자신의 이야기로 한껏 수다를 떨었으며 어떻게든 그녀가 그린 그림을 팔아 보려고 애썼다고 했다. 헤프게 몸을 놀리는 레즈비언이라는 수근거림도 빠지지 않았다. 마네의 전기 작가 타바롱은 빅토린의 이 시기를 슬픈 종말의 시기라고 했는데 왠걸, 1893년에도 빅토린은 여전히 주류 전시회에 작품을 내어 놓고 있었다. 1903년 빅토린은 프랑스예술가협회(the Societe des Artistes Francais) 정회원이 되었다. 이 협회의 정회원이 되려면 기존 회원 두 사람의 후원이 필요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협회의 창설자였다. 빅토린은 사망할 때까지 파리 근교에서 마리(Marie Dufour)라는 여자와 함께 살았다. 당시 행정자료를 뒤져 보면 마리는 비서와 피아노 강사로, 뫼랑은 화가로 기록되어 있다. 빅토린은 여든 셋이던 1927년에 사망했다. 질곡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녀의 지난 삶의 여정을 되 집어 보면 장수한 셈이다. 마네의 그림에 등장해 새우라는 별명을 얻었던 빅토린은 팔등신과 거리가 먼 단구에다 고전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용모를 가졌음에도 훌륭한 모델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녀는 어떤 화가였을까? 얼마 남겨지지 않은 그녀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리 대단치 않은 재능을 소유한 화가였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프랑스와 유럽, 마네와 동시대의 화가들 중에 우리는 과연 몇 사람의 여성화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 시대를 빛냈던 기라성 같은 위대한 화가들의 이름 중에 여자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녀를 대단치 않은 화가로 평가절하 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 테면 여자는 애초에 훌륭한 화가가 될 소질이 없었다거나. 이런 측면에서 그녀가 신통치 않은 혹은 화가였던지 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기억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못 된다. 그 시대의 여성화가로 인상파 화가 중 나름 일가를 이룰 정도로 성공한 화가였던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마저 마네의 제수로 더러 기억될 뿐 더러 마네의 제자였던 에바 곤잘레스(Eva Gonzales)와 그의 모델이었던 빅토린 뫼랑은 각각 마네의 제자와 모델로 더 자주 기억된다.

 

마네, 제비꽃 부케를 든 모리조, 1872년, 개인소장

Edouard Manet, Portrait of B. Morisot with Bouquet of Violets, 1872 Private collection 

 

마네,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1870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Edouard Manet, Portrait of Eva Gonzales, 1870, National Gallery, London

 

모리조는 마네의 모델로 등장하는데다 유명한 인상파 여류 화가였다. 그녀는 마네의 친동생 외젠과 결혼했고 그녀의 딸 줄리가 화가 루오(Georges Rouault)와 결혼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에바 곤잘레스는 마네가 총애한 여 제자로 마네의 제자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모리조의 경우 당대의 지명도에 있어 마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었으므로 제자라기보다는 마네의 동업자에 가까웠다. 물론 둘은 매우 친했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베르트 모리소와 에바 곤잘레스 사이에 모종의 긴장관계가 있었다는 언급도 눈에 뜨인다.

 

개인적으로 스캔들의 기록을 남기지 않은데다 아내 쉬렌과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했지만 마네는 여자들을 사랑했다. 빅토린 이후에 그는 상류 사회의 여인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고 그의 화실에는 그에게 그림을 배우려는 여성들이 출입했다. 그 여성들을 모델로 마네는 걸작들을 남겼는데 베르트 모리조와 에바 곤잘레스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 모델로 그의 화실에 출입했으며 그림에 열정적이었던 빅토린에게 왜 마네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혹은 왜 빅토린은 마네에게 그림을 배우지 않았을까? 진실은 알 수 없다. 단지 마네의 그림 속 그녀의 눈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전 빅토린을 제외한 마네의 여인들이 모두 마네의 써클, 즉 상류층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림 속에서 빅토린의 눈길보다 강렬하게 표현된 사람의 눈길을 알지 못한다. 반쯤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반쯤은 보는 이의 마음을 꽤 뚫는 듯 한 눈길. 그리고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그녀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옅본 후에는 그 눈길은 자신의 의지로 살겠다는 결의의 눈길로도 읽힌다. 화가로서 그녀의 작품을 보고 싶다. 그것이 졸작이어도 실망하지 않겠다. 한 세상 자기 의지로 살다간 여자로, 마네의 작품 속에서 우리에게 서늘한 눈빛을 던지는 모델로서도 그녀는 충분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부분

 

그녀는 어떤 화가였을까? 안타깝게도 현재 빅토린이 그린 작품의 소재를 알 수가 없다. 1930년에 그녀의 작품이 거래되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빅토린 뫼랑의 작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2004년 프랑스의 한 미술품 경매장에서 1885년에 빅토린이 그린 「가지」(Les rameaux)라는 제목의 그림이 거래되면서 그녀의 그림은 다시 등장했다. 그림은 약 오천 달러에 한 개인 소장가에게 팔렸다고 한다.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한 빅토린의 인상은 확실히 강렬하고 그런 까닭에 몇몇 작가들에 의하여 그녀의 삶과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중 여성 미술사가인 립톤(Eunice Lipton)이 대표적이다. 립톤은 빅토린 뫼랑이야 말로 여성 화가가 어떤 방식으로 주류 미술사에서 외면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여성이 미술의 주체라기 보다는 객체로서 혹은 영감을 주는 존재로서 취급되는지 알려주는 상징이라고 했다. 이밖에 근작으로 프라이드 리치라는 작가가 쓴 라는 책도 빅토린의 삶과 의미를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실력 있는 번역자들에 의해 빠른 시일 내에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글에 등장하는 인명의 경우 정확한 발음을 알지 못하므로 가급적 프랑스어 원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혹 잘못된 발음 표기가 있다면 이를 정정하는 답글을 기대한다. 아물러 이 글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영국에서 출판된 마네의 화첩과 국내에 출간된 몇 권의 관련 도서, 인터넷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따위를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알려진 것 혹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식견 있는 분의 예리한 반론이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 이 글의 간간한 첨언만이 오직 나의 것임을 알리며 인용의 상세는 개인적 용도로 쓰여진 글이므로 따로 기재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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