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칼레 시청청사 앞

Calais, Pas-de-Calais, France

2013. 5.

 

오늘날 입헌군주제를 여전히 정치체제로 택하고 있는 영국 왕가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 터잡아 위세를 떨치던 노르망디공국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1066년에 영불해협을 건너 영국 잉글랜드 지방으로 쳐들어가 이를 점령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를 오늘날 잣대로 달리 서술하자면 영국 왕조는 프랑스의 식민지 왕조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고 이를 역사적으로 노르만왕조라 한다. 이후 이 노르만왕조의 “강역(疆域)”은 오늘날 잉글랜드의 대부분 그리고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윌리엄의 사후, 왕족 내부의 상속과정을 거치면서 노르망디공국 치하의 잉글랜드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통치권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고 특히 노르망디지역의 경우 이웃 프랑스 왕국의 간섭, 영향 또는 통치를 받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어 갈등이 첨예화되었다. 이에 14세기에 이르자 프랑스에서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즉 “옛 우리 조상님들 땅인데 어딜 감히”하며 달려든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지역으로 쳐들어가 프랑스 왕국과 그 이웃 공국들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다음 세기인 15세기까지 이어져 이를 역사에서는 100년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 초기에 영국 왕조가 이끄는 군대가 선전하여 프랑스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원정을 통해 한 세기가 넘는 장기간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한계가 분명한 것이어서 결국 전쟁의 결과 영국 왕조는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지역에서의 지배권을 영영 잃고 말았으며 이후 영국 왕조와 프랑스 왕조는 각자 도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영불해협 - 영어로는 English Channel, 프랑스어로는 La Manche - 라는 바다로 분리되어 있지만 두 나라 간 최단거리 도버해협(Strait of Dover)의 거리는 35km 정도에 불과하다. 이 도버해협의 영국 쪽 항구가 도버(Dover)이고 프랑스 쪽 항구가 칼레(Calais)다. 칼레가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라는 점 외에도 칼레를 포함하여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를 포함하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방의 대표격인 플랑드르 지역의 항구도시라는 측면에서 칼레는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도시였다. 100년 전쟁을 일으킨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칼레의 중요성을 간과할 리 만무하여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스 땅으로 쳐들어간 영국 군대는 1347년 칼레로 진격, 칼레를 포위하고 집요한 공격을 퍼부었으며 칼레는 1년 간 영국군의 공격을 버텨내었으나 저항의 막바지에 이르러 칼레의 시민 모두가 영국군에게 학살당할 위기에 놓이기 되었다. 이때 야사(野史)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표시로 칼레의 지도급 인사 6명을 영국에 넘긴다면 나머지 칼레 시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이에 나선 칼레 시민 대표 6명은 죽을 각오를 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묶은 다음 에드워드 3세에게 나가 항복하였다 한다. 다행히 이들은 영국왕의 시혜를 입어 목숨을 건졌던 것 같고 이 사례는 후대 사회지도층이 목숨을 걸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으로 자주 꼽히고 있다 한다.

 

이 영웅적 미담을 후대 칼레의 시민들이 기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칼레시는 당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에게 이 미담을 조각작품으로 재현해줄 것을 의뢰했다. 하지만 로댕에 의해 완성된 청동 조각상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의 모습은 칼레의 시민들이 기대하고 있던,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나머지 시민을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적진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나아가는 6명 시민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각상으로 표현된 6명 시민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곧 닥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영웅이라기보다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로댕의 작품은 돈 들여 작품을 의뢰한 칼레의 시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래서 당초 칼레 시청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조각상은 인적이 드문 근처 공원에 슬그머니 세워졌다가 1924년, 죽음을 앞에 두고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작품에 대한 해석이 올바로 자리잡은 뒤에야 원래 계획된 자리였던 칼레 시청 앞 광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거푸집을 조각하여 주물로 부어 내어 완성한 청동조각상 “칼레의 시민”은 모두 12개가 제작되었는데 칼레 시청 앞 광장 외에 오늘날 영국국회의사당(Westminster Palace) 야외 정원에도 전시되어 있고 제일 마지막 12번째 주물 청동상은 서울 삼성생명 사옥 안 삼성미술관플라토에 전시되고 있다 한다.

 

그 해 봄, 일주일 간 파리와 그 주변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머문 곳이 도버해협 밤 바다 파도소리가 잘 들리던, 그러나 호텔방 바닥에 서걱서걱 모래가 밟히던 칼레의 한 호텔이었다.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를 가르는 바다, 도버해협 해저 아래에는 파리와 런던간 유로스타라는 고속열차가 다니는 해저터널이 깔려 있고 그 선로를 이용하여 도버와 칼레 구간을 왕복하는 화물열차가 운행되는데 그 화물열차에 우리 차를 얹어 타고 다음날 우리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갔다. 아구가 아파 씹기 조차 거북스러운 빵이 나온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 후, 오후 2시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화물열차의 출발을 기다리며 잠시 짬을 내서 우리 가족은 “칼레의 시민”들이 서 있는 칼레 시청 앞으로 가 눈부신 5월 프랑스의 햇살아래 인증샷을 부지런히 찍었다. 그 이전, 그런 로댕의 조소 작품이 있다는 것을 일반상식 문제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조소 작품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없는 처지로 우연히 로댕의 “칼레의 시민” 12개 청동 조소 작품 중 영국국회의사당 뜰에서, 파리 로댕미술관(Musée Rodin)에서 그리고 칼레 시청 앞에서도 보게 된 셈이다. 서울에도 있다니 그것마저 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 12개 중 4개를 보는 셈이 될 것이다. 프랑스 여행의 마지막 날, 칼레 시청 앞에서 담아온 사진을 보니 호텔에서의 불편한 아침 식사 때문이었던지 저 고풍스러운 칼레 시청 청사 안에 들어가 ‘나 다녀감’이라는 표시를 남긴 기억도 난다. 화장실이 개방되어 있던 저 멋진 청사의 내부는 흔한 유럽의 옛 도시, 시청 청사 내부 모습 그대로였다.

프랑스 칼레 시청,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궁전, 프랑스 파리 로뎅미술관

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 1889

The Burghers of Calais, Town Hall of Calais on 6. 5. 2013.

The Burghers of Calais, Palace of Westminster, London on 19. 2. 2013.

The Burghers of Calais, Musée Rodin, Paris on 4. 5. 2013.

 

BGM: Tom Bowling by Charles Dib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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