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 마라의 죽음 │ 프랑스 랭스미술관
Jacques-Louis David, The Death of Marat (Replica), 1793, Museum of Fine Arts of Reim, France
프랑스 태양왕 루이14세가 쌓아 올린 절대왕정의 권세를 등에 업고 1774년 루이16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절대 왕권이라는 체제의 모순 속에 심각한 사회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잘못되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들이 나타났지만 심약한 왕 루이 16세는 정치적 실수를 거듭했고 그의 처 마리 앙투와네트(Marie Antoinette)는 사치로 국고를 탕진했다. 귀족 집권층의 가렴주구에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졌다. 급기야 성난 군중은 1789년 정치범과 불쌍한 백성들을 감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고 루이16세를 권좌에서 끌어 내렸다. 프랑스혁명의 시작이었다.
혁명 후 정권을 탈취한 세력에 의해 혁명정부가 들어섰다. 왕과 왕비는 인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려 사형 당했다. 무지한 백성에 의한 무장 혁명이 전 유럽대륙에 불길처럼 번질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가졌던 이웃나라의 절대 군주들은 군대를 보내 프랑스 혁명에 간섭했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는 그런 이웃의 하나인 오스트리아 왕가 출신이었고 그 점이 그녀가 사형 당한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시민혁명이라 하고 그 주역을 유산계급 부르주아라고 하지만 세상을 뒤엎는 혁명은 일부 사회계층의 계획이나 지지로 성취되지 않는다. 견딜만한 백성들이 혁명에 가담하는 법은 없고 백성들이 가담하지 않은 혁명이 성공한 사례도 없다.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총을 쥐고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세상을 뒤엎은 최초의 근대 시민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정권을 잡은 혁명 세력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지리멸렬했다. 그 중 마라(Marat)는 혁명세력 중 급진파당의 영수였고 인민정부의 독재를 주장하는 과격주의자였다. 그와 그가 이끄는 파당은 상대 세력을 척살하는 행동을 신봉했고 정치투쟁의 와중에 마라는 상대 파당을 지지하는 한 여인에 의해 암살당했다. 화가 다비드(Jacques David)가 그린 「마라의 죽음」(Mort de Marat)은 암살당해 욕조에 쓰러진 혁명 당수 마라의 죽음을 그린 것이다.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서양미술400년展: 푸생에서 마티스까지』전시장 안쪽 에 잠 같은 편안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묘사된 마라가 누워 있었다. 마라의 그림에는 18세기 유럽 대륙을 휘몰아쳤던 혁명의 피비린내가 없었다. 그 고요한 죽음의 얼굴 오른쪽 위에는 배경의 어둠으로 더욱 찬란한 금빛 햇살이 떨어져 횡경막에 예리한 자상을 입은 마라의 어깨와 측면 얼굴과 손에 쥔 편지 위에 떨어졌다. 욕조 바깥 아래로 떨군 그의 다른 손, 핏기를 잃은 창백한 얼굴, 마라를 찌른 날카로운 칼만이 마라가 죽었음을 알릴뿐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열성 지지자였던 프랑스 신고전파 미술의 대가 다비드는 불귀에 암살당한 프랑스 혁명당의 영수 마라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회화의 걸작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다비드는 마라의 가슴 아래 하반신을 가린 욕조 안에 담긴 피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피는 마라의 것이기도 하고 그를 암살한 여인의 피이기도 하고 그에 의해 처단된 정적들의 것이기도 하고 또 그를 따라 혁명을 위해 일어섰다 무참하게 개죽음 당한 숱한 무명 인민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 피의 바다에 마라의 평온한 미소는 일엽편주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니 마라는 다비드의 그림처럼 절명의 그 순간까지도 백성들을 걱정하며 잠 자는 듯 평안한 죽음을 맞았을 리 없다. 마라의 죽음은 다비드의 그림이 풍기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의혹투성이다. 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여인에게 칼에 맞아 죽은 최고 권력자의 죽음이 어찌 그림과 같이 고요하고 성스러운 죽음일 수 있을까? 마라의 죽음은 남은 자들에 의해 더욱 악랄하게 활용되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정치투쟁의 도구로 미화하여 반대당을 숙청했으며 공포적인 독재정치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이를 위하여 마라의 죽음은 더욱 성스럽게 미화되고 조작되었으며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 좋은 선전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혁명정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 남부 코르시카섬의 촌놈 나폴레옹(Napoleon)은 혁명정부의 군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더니 결국에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거머쥐었다. 나폴레옹은 내친 김에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쓰고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혁명정부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마라의 죽음을 명작으로 추모했던 화가 다비드는 잽싸게 노선을 바꿔 이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위하여 그림을 그렸고 또한 너무 유명해서 술병 돋을새김으로까지 이용되는 나폴레옹 황제의 기마도도 그려줬다. 혁명정부의 화가에서 황제의 화가로 재빠르게 변신하여 미술 천하를 거머쥔 다비드, 하지만 세상사 유전과 허망함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제국을 꿈꾸던 풍운의 황제 나폴레옹도 몰락했고 몰락한 권력의 옆 자리에 앉아 알랑방구를 뀌던 다비드는 벨기에로 도망쳐 고향을 그리다가 노년에 객사하고 말았다 한다.
다비드 │ 자화상 │ 파리 루브르박물관
Jacques-Louis David, Self-Portrait, 1794, Louvre, Paris, France
내가 유럽 회화작품에 관심을 두게된 계기는 2005년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서양미술400년展: 푸생에서 마티스까지』라는 전시 관람이었다. 프랑스 랭스미술관(Museum of Fine Arts of Reims)이 소장한 근대 현대 유럽회화 작품 전시였는데 거기서 이름만 알던 앵그르라던가 모네, 부댕 등의 작품을 처음 직관했다.
그중 장자크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큰 감동이었던지 되도 않은 장문의 감상기를 블로그에 남겨 놓았고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그 감상기를 다시 읽어 보니 차마 읽어주기 부끄러운 수준의 잡문이라 비공개로 돌려놓았다가 쪽 팔려도 그 또한 내가 지나쳐온 길들이고 꼭 누구에게 보이자고 블로그에 못 쓰는 글을 쓰고 못 찍는 사진을 올리는 것은 아니므로 옛 글을 다시 조금 다듬어 공개로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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