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도시-붉은 지붕 │ 손상기 │ 1984년 │ 서울시립미술관

2017. 8.

 

나는 시장통 아이였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시장통 아이라는 말은 영악하고 말 안 듣는 악다구니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통하여 선생님들에게 한 대라도 더 쥐어 박히는 수모를 당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하게 자라나는 야산의 잡목처럼 서로 등짝들을 부비며 덕지덕지 붙은 슬레트 집들과 그 집들이 금을 그은 접변 틈에 기대 선 담벼락 밑으로 길게 시장이 들어섰고 그 시장통을 태반으로 삼아 나는 바깥세상으로 뛰쳐나갔다. 나가봤자 별 볼일 없었지만 말이다.

 

그 시장 골목 네거리에는 같은 방향을 보고 두 개의 약국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는데 번듯한 3층 슬라브 건물의 맨 아래 층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약국의 이름은 내 진즉에 잊었지만 그 맞은편 옹색한 단층 슬레트 건물에 들어앉은 약국의 이름과 정경은 아직 내 기억에 선명하다. 꼽추 약사 문씨가 주인이던 문약국이다. 그리고 문약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맞은편 약국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주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며 그 만큼 자주 간판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스럼이나 종기에는 마이신, 나이든 시장 골목 아주머니들이 자주 찾던 두통약 뇌선, 까스명수를 박카스 마시듯 자주 사 마시던 시장통 리어카꾼 아저씨. 문약사가 건네주던 까스명수병을 빼앗듯 받아 선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키고는 땅바닥이 울리듯 꺼억하던 트림은 왜 그리 요란했던지. 리어카 아저씨는 '어이 시원타'라는 감탄사를 내뱉음과 동시에 '얼맨교?'라고 뻔히 하는 가격을 반드시 되물으며 거칠 손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그 사이 미어터지게 볼따구니에 살이 붙은 푸줏간 아들 녀석은 문약사와 상담 중인 지 엄마의 월남치마 끝을 한 손으로 붙잡고 빈 병을 모아둔 박스를 발로 툭툭 걷어차고 있었는데 마침내 박스가 한쪽으로 밀리자 녀석은 한발로 까치발을 딛고서 다른 발을 쭉 내밀어 박스에 구멍을 내려는 듯 세차게 걷어차기를 시도했다. 이때 한 손에 쥔 지 엄마의 헐렁한 월남치마 허리 고무줄이 쭉 늘어나 바랜 속곳이 드러나면 돼지 엄마로 불리던 그녀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돼지 녀석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 갈겨 버렸다. 순간 약국 안에서는 돼지 엄마의 악다구니와 돼지 녀석의 거센 울음보가 터져 소란이 일어나고 꼽추 문약사는 돼지 엄마에게 보이려고 내어 놓은 테이블 위의 원기소를 멍하니 쳐다보며 그 소란이 수습되기를 기다렸다.

 

미숫가루를 다져 환약으로 말려놓은 듯 고소한 맛이 나던 원기소를 나는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모른다. 그 원기소 한 통만 먹으면 다음 운동회 때는 달리기 1등을 해서 누런 재생 갱지로 만든 공책을 부상으로 반드시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원기소를 사 달라고 조르지 못한 채 다른 아이들 보다 키가 훌쩍 더 커버렸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어머니는 돼지네 푸줏간에서 소 간을 마련하여 틈틈이 참기름 종지와 함께 아버지의 밥상에 올려놓으셨고 문약국에 들려 3개월짜리 간장약을 목돈 들여 마련하여 이른 새벽 일터로 나서시는 아버지의 도시락에 두 알씩 함께 담아 내셨다. 그 때문이었을까? 문약국 앞 난전에서 말뜻 그대로 풍상을 맞으며 평생을 보내신 어머니 눈은 점점 침침해지고 환하던 얼굴에는 주름밖에 남은 것이 없게 되었지만 노년의 늙은 아버지는 아직은 건강하시고 여전히 아침마다 노동의 일터로 나가신다.

 

문약국에 늘 시장통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유는, 물론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헬쓱한 얼굴에 무더운 여름철에도 모직 조끼를 벗지 않던 문약사가 지은 조제약이 용하기로 그리고 시장 골목 없는 사람의 사정을 알아 약값 바가지를 씌우지 않기로 소문이 난 때문이었다. 목 좋은 시장통 네거리 문약국 맞은편에 몇 번이나 삐까번쩍한 약국이 들어서고 진열대에 갖은 좋은 약을 비치했다는 소문이 퍼져도 문약국은 끄떡없이 버텼다. 학교를 파하고 어머니의 난전에 함께 주저앉아 있을 때면 정오 무렵 찾는 발길이 뜸한 시장은 그제야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고 어느 새 함석 셔터를 열어 놓은 문약국의 문약사는 키 높은 회전의자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망연히 먼 어디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어린 나는 까닭 모를 쓸쓸함을 느끼고는 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시장통과 시장통에서 가지를 뻗은 미로 같은 슬레트 지붕이 이어진 산비탈 골목길에도 요란한 개발의 바람이 불어 불도저가 밀어낸 시장통 어디 즈음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비탈길 산허리 어디 즈음에는 잡목에 불과한 그러나 내게는 너무도 훌륭한 놀이터가 되어준 나무들이 불도저에 밀려 넘어지고 엄한 이국 수종의 나무들이 새로 심어진 공원이 들어섰다. 이후 어머니가 주어온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문약사는 시내 중심가에 제법 번듯한 약국을 새로 개업했다 한다. 한편, 어머니도 다달이 붇던 계의 계주 돼지 엄마는 계를 깨 먹고 종적을 감추었다 하는데 다행히도 어머니는 이미 곗돈을 타 먹은 뒤의 일이라 세상 일이 알 수 없느니 혀끝을 차시며 안타까이 말을 전하고 있었는데도 입가엔 살짝 엷은 미소가 번져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개발의 틈바구니에서 우리 집을 포함하여 외롭게 버티던 몇몇 옛 가옥들은 제법 번듯한 슬라브를 올리는 개수를 통해서 용케도 아직 살아남아 있다.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릴 의미 없는 옛 기억을 오늘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이유는 유화 그림 한 컷 때문이다. 1949년 남해 여수의 바다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 손상기(孫祥基), 시골 어촌에서 아름다운 바다가 선사하는 진주 같은 재능을 발하던 소년은 결국 구루병 그러니까 척추가 휘어져 곱사등이 되는 흔히 곱추라고 하는 잔인한 운명의 할큄을 비껴가지 못했다.

 

천형 같은 불구가 남긴 세상과의 단절 중에 그는 글과 그림에 천착하며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를 열 수밖에 없었으며 여수에서 이리로, 이리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며 자신을 확인해 나갔다. 그러나 화단의 찬사 뒤에는 아현동 굴레방 다리 밑에서 개업한 가난한 화실 주인일 수밖에 없는 생활고와 허약한 육신의 고통의 그림자가 그를 늘 죽음 가까이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피폐해져 가는 육신을 태워 그저 그리고 또 그리며 자신을 죽음을 향해 다가갔다. 똑바로 쳐다봐 주어도 험난했을 1980년대 초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돌아 앉아 있을 때 결국 그가 딛고 하늘에 간 아현동 언덕배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남긴 그림이 일련의 공작도시 시리즈이며 기중 내 눈길이 멈춘 그림이 「공작도시 – 귀가」이다. 그 그림을 세상에 내놓을 때 쯤 그제야 화단의 인정을 받으며 오래도록 자신을 곁에서 지켜준 여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안정을 찾아가던 손상기는 그 안정 속에서 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1988년 2월 오랜 지병 끝에 죽음을 맞았다. 의사에 의하면 망가진 몸으로 오히려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살이었다.

 

아현동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손상기의 음울한 도시 풍경들은 국민학교 저학년 꼬마의 눈으로 바라보던 그 옛날의 시장통과 닮아 있다. 그리고 손상기와 같은 병을 앓던 문약국의 문약사는 어머니가 오래 전에 전해 주시던 소문처럼 지금도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약국의 키 높은 의자에 앉아 가을바람이 쓸쓸히 몰려다니는 시내 거리의 어디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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