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 "금붕어" 베낀 그림
Copy of Henri Matisse's "The Goldfish" 1912
2020. 6.
나는 연필 쥐고 글보다 그림을 먼저 그렸다. 큰 달력의 뒷면은 소중한 그림판이어서 누나는 매월 첫날 조심스럽게 지난 달력 면을 뜯어내서 내게 주었다. 달력 뒷면은 조잡한 연필로 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내 그림과 그림에 대한 내 이야기를 정말 좋아해주었다. 하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내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해준 선생님이 없었다. 그림이라는 것이, 미술이라는 것이 달력 뒷면에 연필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따로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상상력을 필치기 위해서는 도화지도 물감도 붓도 사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국민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림 그리기가 재미없어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 첫 미술시간에 미술 선생님은 준비물로 도화지와 4B 연필을 가져오라 하셨고 그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은 이름은 잊었지만 별명이 ‘까징거’였던 아이를 교탁 위에 앉혀놓고 우리들에게 까징거를 그리라 시켰다. 연필을 손에 쥐고 쓱싹쓱싹 까징거를 그려가는 나를 본 미술선생님은 미술반을 해보지 않겠느냐 물었다. 물론 속으로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정작 대답은 “공부해야 된다꼬 ... 집에서 하지 말라꼬 할낀데예”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이미 미술을 한다는 것이 비싼 화구도 사야하고 학원도 다녀야 하고 대회도 다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런 미술을 하고 싶다고 집에 말할 형편이 전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나와 형 그리고 나까지 겨우 중학교, 고등학교 보내는 일을 가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토록 고생하고 힘들어 하시는데 하라는 공부는 않고 미술이라니? 고등학교 첫 미술시간에도 미술반 이야기를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지만 그때는 “어데예”라는 나의 대답 한마디로 간단히 상황은 정리되었고 그림은, 미술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게 없던 일이 되었다.
성년이 되어 지잡대 졸업장 들고 턱걸이 하듯 취직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그림이니 미술이니 하는 낱말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죽을 때도 빽 소리를 내며 죽는다는 험한 사회 험한 세상에서 지잡대 졸업장 달랑 들고 빽 한줄 없이 어렵게 취직하여 그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림이라니 미술이라니 뭔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 퍽퍽한 세상살이 와중에도 책은 많이 읽었고 내 독서 목록에 나도 모르는 사이 슬그머니 그림에 대한,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는 미술 전시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으며 나도 모르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장에 서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므로 잘 알지도 못하는 회화 작품 앞에서 까닭을 알지는 못해도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함을 느끼는 일이 잦았으며 나이 마흔을 넘겨 영국 주재원 생활 중에 찾아다닌 런던의, 파리의,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서 직관한 많은 대가들의 걸작들 앞에서 황홀했다. 내가 그리지 않아도 그림을 앞에 두고 즐거움과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나이 마흔을 넘겨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저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나이 오십을 넘긴 어느 날 우연히 아들이 어릴 때 쓰던 스케치북이며 크레파스를 발견했는데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서재로 가져와 그때부터 사진으로 담아 놓은 좋아하는 풍경을 옮겨 그리거나 좋아하는 옛 대가들의 작품들을 베껴 그렸다. 처음에는 아들의 크레파스로 시작했지만 요즘은 유성 색연필, 유성 마커도 쓰고 아크릴 물감도 쓴다. 못 그린 그림이라 완성해 놓은 그림에는 늘 허접하게 마무리 해놓은 구석이 남지만 세상사 어지럽고 소심한 내 마음이 심란할 때는 언제나 연필을 쥐고,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며 그림 그리는 동안만큼은 나이 오십 넘어 육십 줄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평온 이상으로 그림 그린다는 것의 즐거움, 행복함을 맛본다. 흔한 말, 이 풍진 세상 재미지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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