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 로그/내셔널갤러리

임금님의 주걱턱

the.story.teller 2021. 12. 6. 10:14

벨라스케스,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초상화, 1635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Diego Velazquez, Portrait of Philip IV, Natinal Gallery London

 

런던 내셔널갤러리는 1824년에 설립된 국립미술관으로 13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서유럽 회화작품 2,300여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비슷한 성격의 유럽 미술관들이 대개 자국 미술작품 중심이라면 내셔널갤러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작품에서부터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의 미술작품들,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미술작품까지 서유럽 미술 전체를 일람할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 최고 미술관으로 불러 크게 부족함이 없겠다. 내셔널갤러리 소장 목록은 유럽 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의 주요 작품도 포함하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왕실 화가여서 그의 걸작 중 그가 모신 스페인 왕 펠레페 4세와 그 일족들을 그린 초상화가 다수이며 내셔널갤러리는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4세 등신대 초상화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모델의 의뢰를 받아 그리는 초상화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모델과 너무 닮아서도 또 너무 닮지 않아서도 안 되는 복잡 미묘한 작업인 것이다. 하물며 그 의뢰인이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임에랴. 내셔널갤러리 너른 전시실 가운데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작품 펠리페 4세의 등신대 초상화를 보면서 그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걸작을 만들어낸 왕의 초상화야말로 대가와 평범한 화가를 가르는 잣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찍이 대양 항해술을 터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무대로 한 약탈전쟁에 뛰어든 스페인은 16세기 말에 이르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리는 최 전성기를 맞았다. 1580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을 병합했을 때 스페인의 영토는 이베리아반도 전역의 본토에다 남미대륙 전부, 아시아의 필리핀과 말라카, 인도 서부 해안지대, 유럽의 네덜란드와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브루고뉴, 사르데냐 등을 식민지로 두고 있던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제국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내부적으로 곪아 가고 있었다. 해외 식민지로부터 약탈한 엄청난 재화가 흘러 들어왔지만 정작 이는 왕실과 국가를 살찌우는데 들어가지 않고 끊임없이 전쟁에 개입한 통에 대부분 전비로 탕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쟁도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위그노와 갈등을 빚으며 일으킨 허울뿐인 명분에 치우친 전쟁이 대부분이었다. 스페인의 영토는 전 세계에 걸쳐 있었고 특히 남미대륙에서 원주민들을 거의 절멸시키는 지경에 이르도록 약탈을 자행해 엄청난 양의 은(銀)과 갖은 재화가 스페인으로 흘러들었지만 펠리페 2세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네 번이나 디폴트 즉, 국가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정도로 국가의 재정상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 스페인의 빛과 그림자는 다음 왕위를 이은 펠리페 3세 그리고 펠리페 4세로 그대로 이어졌다. 펠리페3세는 무능한 군주의 전형이었다. 정사를 신하에게 맡긴 채 사치스러운 궁정생활에 몰두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무어인 추방령과 같은 악수만 두어 역사학자들은 펠리페 3세의 치세부터 스페인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단정한다.

 

이런 부담, 그러나 당사자는 알지도 못했을 부담을 안고 1621년 즉위한 펠리페 4세는 개인적으로는 영리하고 풍부한 교양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부왕 펠리페 3세와는 다른 인물이었으나 군주로서 정치적으로 무능했다는 점은 부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부왕이 정사를 신하에게 맡기고 사치와 향락에 몰두했다면 펠리페 4세는 정사를 총신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맡기고 스스로 시인을 자처하며 문화예술 진흥에 몰두했다. 물론 올리바레스 백작은 유능한 신하여서 그간 스페인의 발목을 잡았던 여러 부조리들을 일소하고 국고를 튼튼히 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곳간 사정에 무심한 지주를 둔 마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올리바레스 백작이 추진한 여러 개혁조치들은 이해관계를 가진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고 카탈루냐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정의 혼란이 극심해졌다. 펠리페 4세는 올리바레스 백작을 실각시키고 직접 정사를 챙기기 위해 나서기도 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 버렸다. 펠리페 4세의 치세 동안 스페인 왕가의 영지였던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을 통해 스페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했고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의 영향력 약화를 목격하고는 재빠르게 독립의 길을 택했다. 이들 유럽 국가의 독립은 스페인에게 식민지 일부분을 잃는 것 이상의 타격을 의미했다. 그것은 유럽에서 스페인이 그 패권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 왕가의 몰락은 가족 내부의 내밀한 부분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초상화, 1626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Diego Velazquez, Portrait of Philip IV, Museo del Prado, Madrid

 

1516년 카를로스 1세로부터 시작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하악전돌증, 흔히 말하는 주걱턱이 대대로 유전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의 주걱턱이 오죽 심했던지 주걱턱을 일명 ‘합스부르크 립’이라 한다. 심한 주걱턱은 외모 상 콤플렉스를 유발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큰 불편을 초래한다. 윗니와 아랫니의 부정교합으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던가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해 만성적인 위장병으로 고통을 받기도 한다. 주걱턱은 부모 양쪽으로부터 해당 유전자를 물려 받을 때 생기는 열성 유전병이다. 이 유전병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심하게 나타난 것은 우연히 나타난 천형의 결과였기 때문이 아니라 왕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심한 근친혼을 이어간 때문이었다. 사촌간 결혼은 흔했고 삼촌이 조카와 결혼하는 일조차 드물지 않았다. 이 근친혼의 결과 부왕 펠리페 4세에 이어 겨우 네 살 때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2세는 심한 주걱턱에 병약하여 결국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1700년 서른 아홉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합스부르크 립은 왕가의 권력에 대한 탐욕이 스스로 부른 재앙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그 대를 다하고 말았으며 자리가 빈 스페인의 왕위를 놓고 유럽 여러 나라가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이라고 부르는 큰 전쟁을 벌인 끝에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계 부르봉 왕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 끼여 들어 프랑스를 지원한 영국은 이때 얻은 콩고물 격으로 유럽대륙과 아프리카대륙 사이 전략적 요충인 지부롤터를 얻게 되는데 지부롤터는 아직도 영국령으로 남아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의 부왕이었던 펠리페 4세 역시 심한 주걱턱을 가지고 있었다. 1624년 스물 다섯 살의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는 즉위 2년째를 맞은 펠리페 4세의 왕실 화가가 되어 이때부터 왕과 왕의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이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 알아서 주걱턱을 무시하면 오히려 주걱턱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고 보이는 그대로 주걱턱을 묘사한다면 유능한 화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벨라스케스는 왕실 화가로 왕가의 초상화에 그들 주걱턱을 어떻게 표현할 지 큰 고민을 겪었을 것이다. 지금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는 1627년에 벨라스케스에 의해 완성된 펠리페 4세의 등신대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초상화에는 펠리페 4세의 주걱턱이 확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립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또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특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35년 서른 살이 된 펠리페 4세의 등신대 초상화는 펠리페 4세의 주걱턱이 이전보다 오히려 완화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이 1635년작이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 전시되어 있고 제왕의 의복을 걸치고 한껏 멋을 부린 자세로 당당하게 서있는 펠리페 4세의 초상화를 몇 차례 볼 때마다 나는 왕의 모습에서 위엄보다는 쓸쓸함, 안쓰러움과 같은 감정에 젖곤 했다. 그 감정의 정체는 모델인 펠리페 4세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화가인 벨라스케스의 심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평생 신분상승에 대한 치열한 갈구를 감출 수 없었던 위대한 궁정화가는 예순 하나였던 1660년 사망했다. 사인은 과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