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역사다
헤이스팅스는 1066년 오늘날 프랑스 노르망디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노르만족의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영불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쳐들어 가서 영국의 패권을 놓고 앵글로-색슨족의 왕 헤롤드(the Anglo-Saxon King Harold Godwinson)와 격전을 벌인 영국 역사 상 매우 중요한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의 현장이고 한편으로 헤이스팅스 전투와 관련된 영국 역사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의 역사 해석 논쟁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는 좋은 주제이기도 해서 그간 읽은 몇 권의 책과 위키사전 등에서 얻은 정보를 곁들여 몇 자 포스팅을 남겨볼까 한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왕 헤롤드의 죽음을 그린 11세기 바이외 테피스트리 그림
영국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다는 세계 최강대국이었고 부자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오늘날에도 영국은 여전히 G7에 속하는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그러나 기원 전 후 무렵 로마제국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던 시대에 영국은 야만족이나 사는 제국 변방의 섬나라일 따름이었다. 로마가 제정시대에 접어든 후 브리타니아 곧 오늘의 영국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서야 지금의 잉글랜드 정도만이 사람 살만한 곳 취급을 받았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이북 지역, 아일랜드는 아예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으로 못을 박고 히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벽을 쌓을 때도 스코틀랜드는 제국의 바깥으로 여겨 아예 금을 그어 놓았다. 로마의 힘이 쇠잔해지자 브리타니아에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로부터 원주민들이 침입했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족과 색슨족, 쥬트족 쳐들어 왔으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계 바이킹이 휘젓고 돌아 다녔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5세기와 11세기 사이에야 겨우 오늘날 영국인의 조상이 되는 민족개념으로서의 앵글로색슨인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이 조차 이민족의 침략이 빈번하여 한때는 아예 덴마크계 바이킹인 데인인을 왕으로 받들어 모셔야 하는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1066년 지금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바이킹의 일족인 노르만족의 왕 윌리엄은 기껏 7,000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영국해협을 건너 그 영국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영국왕은 앵글로색슨계의 해롤드2세였으나 헤이스팅스에 이른 침략군과의 접전에서 참패하고 말았으며 헤롤드 자신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앵글로색슨인이 아니라 노르만인이었던 윌리엄은 영국의 왕이 되어 역사책에 정복왕 윌리엄으로 기록되었다. 윌리엄이 세운 노르만 왕조의 치세는 이후 수백 년간 계속되었으며 오늘날 영국 왕가는 이 윌리엄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이 영국 왕실의 언어는 앵글로색슨족의 언어 곧 오늘날의 영어가 아니라 노르만어였다. 오늘날 만국 공용어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영어는 당시에는 가련한 잉글로색슨인의 토착어일 따름이었다. 영어가 영국에서 통용어로 공인된 것은 13세기 헨리3세 치세의 일이었다.

헤이스팅스 전투의 노르만족 기사와 궁수들을 그린 11세기 바이외 테피스트리 그림
이후 중세 유럽 왕가의 복잡한 통혼관계의 결과로 19세기 영국 왕실은 독일계인 하노버 왕가로 불리게 되었다. 하노버 왕조의 처음 두 왕은 영어를 아예 몰랐고 3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영어를 쓰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이 하노버 왕조라는 명칭을 버린 것은 20세기에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인데 이때 적대국인 독일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탓에 왕실 별궁의 이름을 따 윈저 왕조라고 바꾸게 되었다. 정복왕 윌리엄 이래 이어진 영국 왕조의 역사에 영국인, 곧 앵글로색슨인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니 윌리엄이 처음 영국 지배를 확정 지은 헤이스팅스전투는 영국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앵글로색슨 민족이, 그들의 언어가 이렇게 한심한 전철을 밟아왔다고 해서 그들이 이룩한 대영제국의 위업이, 만국공용어가 된 영어의 중요성이 티끌만큼이라도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의 법통이 프랑스에서 건너간 노르만 종족이고 또 후대에 독일인의 피가 섞여 들어갔다고 해서 프랑스가, 독일이 영국의 역사를 자국 역사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바 없으며 야만족이 사는 브라타니아를 정복한 것이 로마인들이라 하여 이탈리아가 영국이 고대에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고대에는 자국이 영국에 문화를 전수했다고 거들먹거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했다. 로마의 역사는 로마의 역사이며 로마의 속령 브리타니아의 역사도 로마의 역사이지 영국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중국이 고구려의 역사를 아무리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안달을 해도 혹은 우리가 아무리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강조해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과 만주에 존재했던 고구려라는 고대 국가의 역사다. 일본이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했다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고대 일본과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의 역사이고 일본 천황가의 핏줄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또 그때 한반도에 있던 고대국가들이 아무리 뛰어난 문화를 일본에 가르쳐줬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국의 역사이며 또 고대 일본의 역사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가 받아들인다고 하여 오늘날의 일본이, 중국이, 한국이 갑자기 위대해지거나 갑자기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이다.
노르만의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침략할 때 건너간 바다 영국 해협(English Channel)은 날씨가 불규칙하고 파도는 사나우며 바람은 거센 곳으로 알려져 있다. 11세기 정복왕 윌리엄 이전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나설 때도 그는 오늘날의 영국해협을 건넜고 그의 갈리아 전기에 험한 파도와 조류 때문에 표류를 하는 등의 고역을 기록해 두기도 했다.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프랑스를 점령한 나찌 독일을 몰아내려고 노르망디 해안을 향해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쏟아져 건너간 험한 바다도 영국해협이다. 런던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그 영국해협에 면한 작은 항구도시 헤이스팅스에서 담아온 사진을 보며 제법 오래 전에 몇 권의 역사 관련 책들을 읽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를 얻어 남기는 잡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