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쓰 프루프
회사 근처 지하철역에서 벌써 몇 해째 용감하게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해적 DVD 좌판에서 사들인 쿠엔티 타란티도(Quentin Tarantino) 감독 영화 DVD『데쓰 프루프』(Death Proof)가 비닐 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그 영화를 봤는데 과연 명작이라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옛 신작에 흠뻑 젖어보았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1992년 『저수지의 개들』 (Reservoir Dogs)과 1994년 그해 세상의 이름 난 영화제를 싹 쓸어버린 『펄프 픽션』(Pulp Fiction)으로 인기 감독의 반열에 오름과 동시에 그 시절 내 젊은 영혼을 사로잡은 명감독이다. 이후 그의 영화라면 빠짐없이 섭렵해봤다. 그의 영화는 이른바 삐끕 영화, 쌈마이 영화를 스스로 주장하는데 이는 비디오대여점 점원 등을 전전한 쌈마이 인생이었던 그의 지난 이력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 그가 만든 영화의 스토리는 엉성하고 때로 연기자들의 연기는 형편없으며 화면은 조악하고 극의 전개는 엉뚱하다 싶을 만큼 비약적이다. 하지만 만화가 뺨을 맞고 돌아설 만큼 상상력의 구현에 한계가 없고 이렇게 영화를 보며 그가 버무려 놓은 잡탕에 얼얼해 있는 순간 보는 사람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반전, 그것이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핵심이다. 쿠엔틴 타란티노표 영화는 영화의 롤러 코스터요, 영화의 바이킹이다. 하지만 세상사 인생사에는 부침이 있는 법이라 연작으로 만들어진 『킬빌』 두 편을 보면서 이것을 퇴보로 불러야 하나 싶을 만큼 실망스러웠다. 『킬빌』에서는 상상력이 보이지 않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롤러코스터는커녕 담배연기 매캐한 만화빵의 음침한 구석자리에 묻혀 재미없는 만화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때우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우리의 『올드 보이』를 두고 극찬을 보냈더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흘러간 옛 사람이 한마디 남겼다는 이상의 감흥이 솟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영화가 아쉬울 때면 언제나 그 이름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전작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제키 브라운』 등이 남긴 인상이 너무 강렬했던 것이다. 하여간 재발견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새 영화 『데쓰 프루프』, 이 영화를 들고 타란티노는 거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성도착자인 미친놈이 늘씬한 미녀 다섯을 끔찍하게 살해하고 이 살해 사건은 완벽한 완전범죄로 남게 된다. 제 버릇 개 못 주니 이 범죄 후에도 새로운 범행대상을 물색하다가 정말 그 범행대상에게 오히려 끔찍하게 당한다는 줄거리니 『데쓰 푸르프』에는 그의 전작들을 통해 느꼈던 극적인 요소들이 빠짐없이 재현되어 있었다. 영화감독 이전에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이력을 보면 불알 두 쪽 달랑 차고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데 이렇게 발가벗고 달려든 영화판에서 거장이 되었다. 그의 무기는 상상력과 영화를 즐기는 대중이 무엇인지 간파하는 예리함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엽기라는 코드까지 가미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시류에 꼭 맞는 영화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족이야 어찌되었든 『데쓰 프루프』는 재미있는 영화이므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부끄러움 없이 강추 하는 바이며 반전의 쾌감과 전복의 카타르시스, 그리고 즐거운 상상력의 유희에 아낌없이 빠져들기 바란다. 그리고 그 현란한 음악의 향연까지 곁들여 즐기시면 좋겠다. 2008